껍데기를 들춰도 단단한 이병헌
껍데기를 들춰도 단단한 이병헌
  • 김지원 기자
  • 승인 2020.02.06 1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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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병헌 / 사진. BH엔터테인먼트 제공

멜로, 범죄, 액션, 사극 등 넓은 연기 폭을 자랑하는 이병헌은 늘 훌륭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최근 재난영화 ‘백두산’에서는 북한 요원 역을 맡아 남측 군인 역의 하정우와 함께 이념을 뛰어넘는 진한 우정과 유쾌한 케미를 보여줬다. 1960~70년대 한국정치사를 드라마틱하게 담아낸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치밀하고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이병헌은 할리우드에서도 사랑하는 배우. 매 순간이 계산된 게 아닐까 싶은 그의 연기에 언제나 매료될 수밖에 없다. 그는 껍데기보다 내면부터 다진 연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0. 영화 ‘백두산’에서는 어떤 점이 좋았나?

시각적으로 스케일이 큰 재난 영화에 버디 영화의 요소가 가미된 점이 매력적이었다. 재난 영화와 버디 영화의 요소가 모두 담긴 영화는 흔치 않아서 차별화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10. 전형적인 스토리가 좀 아쉽긴 했는데.

상황 설정이 강한 재난오락영화는 기존의 공식을 완전히 깨긴 어렵다. 클리셰를 따라간다는 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예측 가능할지라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놀랄 만한 비주얼을 보여주고 유머, 눈물, 감동이 버무려진 재미를 선사한다. 나름대로 아쉬운 점이야 있겠지만 상업영화의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재미를 줘야한다는 것이다.

10. 백두산 화산 폭발을 막는 작전에 핵심 정보를 가진 북한 무력부 소속 요원 리준평 역을 맡았다.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다 수용소에 갇혔는데 첫 등장부터 눈빛이 강렬했다. 그런 눈빛은 어떻게 나오나?

내면의 감정을 그런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게 중요하다. 그 감정의 상태에 가까워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러면 눈빛이나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껍데기를 만들기 전에 내면부터 다져야 한다. 촬영을 쉬는 시간에도 감정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레벨을 마구 올렸다 내렸다 하긴 어렵다. 그건 모든 배우들이 갖는 어려움이지 않을까.

10. 연기를 준비하는 스타일은 어떤가? 대본을 세세히 뜯어가며 분석한다든가 흐름 정도만 파악한다든가….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집에서부터 공부해 와서 연기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캐릭터가 영화 안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등을 처음에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주관적으로 인물을 보면서 캐릭터의 감정을 상상해본다. 대사를 외울 때가 아니고선 특별히 대사를 연구하듯 들여다보진 않는다. 한두 번 읽고 나서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는 게 나한테는 좋은 방법이다.

10. 하정우와 연기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잘 맞았나?

서로 성격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정우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재치는 우리가 사실 다 알지 않나. 기대했던 것만큼 역시나 그랬다. 카메라 앞에서도 재밌고 맛깔나고 유머러스하게 연기하더라.

10. 두 사람 다 재치 넘치니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

에피소드라기보다 하정우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하정우는 매 컷이 끝날 때마다 밖에 나가서 걷거나 뛰었다. 촬영 당시가 여름이었는데 세트장 안에서는 촬영 전에 에어컨을 켜놓지 않나. 그래서 약간 서늘하기도 하다. 심지어 나는 코트를 입고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하정우는 민소매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더라. 우린 땀 분장을 해야 하는데 그 친구는 자연적으로 나온 땀이었다.

10. SNS를 통해 촬영 현장이나 일상을 공개하기도 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SNS 계정을 만들었나?

‘지아이조2’를 찍을 때부터 미국 매니저가 SNS 개설을 권유했다. SNS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거기에 에너지를 나눠서 쏟게 될까봐 걱정했다.(웃음) 떠밀리다시피 개설했는데 기왕 시작한 거 재밌게 해서 사람들에게 잠깐이라도 웃음을 주자, 잠깐이라도 추억에 잠길 수 있게 하자 싶었다. 내가 좋게 본 영화를 추천할 수도 있고, 내 영화를 홍보할 수도 있어서 조금씩 매력을 느끼고 있다. (SNS에 올리기 위해 남들처럼 사진을 몇 장씩 찍기도 하느냐고 묻자) 그건 당연하다. 물론이다.(웃음)

 / 사진. BH엔터테인먼트
배우 이병헌 / 사진. BH엔터테인먼트 제공

10. 데뷔 30년 차가 됐다. 배우로서 기폭제가 된 작품을 꼽는다면?

‘달콤한 인생’ 아니겠나. ‘달콤한 인생’을 통해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유럽 등 외국에 처음으로 나와 내 영화를 알렸다. 미국에 에이전시도 생겼고 미국에서도 일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작품적으로도 누아르라는 장르의 마니아를 생기게 했던 것 같다.

10.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을 주최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다.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시상자로도 참석했다. 유력 부문 후보에 오른 ‘기생충’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질 텐데.

기대가 대단하다. 지난번 시사회 뒤풀이에 이선균 씨가 왔는데 시간이 된다면 시상식에 꼭 가라고 했다. 다른 문화의 시상식을 경험해본다면 좋을 거라고 했다.

10. 어떻게 다른지 알려 달라.

시상식인데 리허설이 있다. 시상자도 리허설을 한다. 방송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쯤 파티를 한다. 시상식장 밖의 로비 같은 곳에 큰 바가 있다. 거기서 술이 계속 나오고 사람들이 턱시도,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모두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오스카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고 즐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긴장돼서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 특이했다. 객석에 배우 등 후보들이 앉아있는데 그 사람들의 대역도 있다. 그 사람이 잠깐 화장실에 가거나 시상을 하기 위해 20분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하면 턱시도를 입은 사람이 와서 앉는다. 빈자리가 있으면 보기에 좀 그렇다고 생각하나보다 싶었다.

10. 할리우드 영화 제안은 없나?

고민하다가 안 하게 된 작품도 있고 한국 작품에 출연키로 결정을 하자 제의가 온 할리우드 작품도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작품도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스케줄이 이상적으로 맞춰지지 않는다. 내년 중반까지는 이미 스케줄이 정해져 있다.

10. 개봉 시기야 배우가 정하는 건 아니지만 ‘남산의 부장들’도 최근 선보였다. 끊임없이 일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작품에 몇 개월간 열정을 쏟아 붓고 나면 에너지가 소진됐다는 느낌도 받고 새롭게 채웠으면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 작품을 받아들일 만큼 준비가 되는 것, 이상적으로 스케줄이 맞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다가 ‘이거 괜찮은데?’ 싶어 알아보면 지금 촬영 중인 작품에 바로 이어서 들어가야 하는 식인 것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부족해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10. 글로벌한 연기 활동을 하고 있는데 계승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

어떤 배우를 롤모델로 삼기보다 내가 나이 들어가며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 그건 기대일 수도 있고 궁금증일 수도 있다.

10. 배우로서 어떤 목표를 갖고 있나?

내가 어떤 작품을 찍는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을 보고 싶다’는 얘기를 오래 듣고 싶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 종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인데 인생의 곡선은 누구나 있는 것이다. 그 곡선이 얼마나 길게 늘어지느냐, 얼마나 급격하게 떨어지느냐의 문제 같다. 그래서 ‘기다려진다’는 얘길 오래 듣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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